평양대부흥 100주년 기획!
메리 스크랜튼
1886년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우고, 20여 년 간 여성지도자 양성과 선교사업에 전력한 스크랜튼 여사의 일대기를 재조명해봅니다. 감리교 목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선교의 꿈을 키워갔던 스크랜튼.
스크랜튼은 오하이오주의 작은 시골교회에서
88달러의 작은 씨앗헌금을 받아
한국으로 파송됐습니다.
이곳의 여선교회는 지금도 작은 소식지를 만들며
한국과 세계 여러 지역의 여성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여성교육의 시작은 이처럼 작은 교회의
이름 없는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시작됐습니다.
[인터뷰] 이덕주 교수 / 감리교 신학대학교
"여성의 몸으로 선교사가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곳에
개척선교사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스크랜튼 대부인은 선교적 결단을 했습니다."
자신의 편안한 노후를 뒤로 한 채
53살의 나이에 한국에 온 메리 스크랜튼.
그녀는 1885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의사인 아들 부부와 함께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녀는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여선교사였으며,
한국최초의 여학교를 세워
이 땅의 여성들에게
이름과 복음의 자유를 심었습니다.
[인터뷰] 이덕주 교수 / 감리교 신학대학교
"한국사회, 특별히 여성사회를 변혁시키고 근대화해서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여성의식들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
스크랜튼 대부인의 여성의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886년 봄, 스크랜튼 여사는
전염병이 창궐한 서울 거리에서
죽어가는 엄마의 품에 안긴
어린 소녀를 발견했습니다.
그 소녀가 바로 이화학당의 첫 학생이 되었습니다.
스크랜튼은 한국여성들을
보다 나은 한국여성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로
고아와 과부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감리교의 역사자료실이 있는 두루 신학대학교.
선교사들의 친필문서와 선교편지가 보관된
방대한 자료 속에서 취재진은
스크랜튼의 눈물어린 선교편지를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권리와, 인권에 대해 관심을 쏟았던
스크랜튼의 학원선교!
그녀의 신앙과 삶은 12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선교의 이정표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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