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사람들/김구 선생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 그의 어린
시절 본명은 창수였습니다.
엄마: “창수야! 너 또 숟가락 부러뜨려서 엿 바꿔 먹었니? 이리 오지 못해?”
유난스러운 개구쟁이 시절을 보내고, 열일곱 되던 해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결과는 실패.
이후 그는,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정부패에 맞서 동학에
입교했고, 겨우 열 아홉의 나이에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에서 동학혁명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로도 솟구치는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던 백범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명성 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병중위를 맨손으로 처단했고, 결국 그 일로 사형을 선고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가까스로 탈옥에 성공해, 잠시동안 공주 지방에 머물며 잠시 승려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얼마 후 복음을 접할 기회가 찾아오는데....
김구: “아…, 예수님이라…. 이것이야말로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참 진리로구나!”
이후 백범은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고,
전덕기 목사 등을 주축으로 한 상동교회 지사들과 함께
구국대열에 앞장섰습니다.
김구: “지금 우리나라에 무엇보다 필요한 건 바로 계몽입니다!
이 민족이 무지를 벗을 때까지 힘을 모읍시다!”
그러던 1911년, 항일 비밀 결사안체인 신민회 사건이 발발
하며 백범은 또다시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밤에도 몇 차례나 실신을 거듭하던 그는,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도 철창 안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조국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곤 했습니다.
김구: “저 왜놈 경찰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을 바늘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 스스로 애국자인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에 눈물이
넘치는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백범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의 길을 떠났고.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며,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을 위한 노력에 전력을 다 했습니다.
1945년, 드디어 대한 독립이 이루어졌고, 그제야 백범도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식민통치에서 막 벗어난 조국은 여전히 어지러웠고, 그는 우리 민족 스스로의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반탁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김구: “여러분, 우리는 남과 북으로 잘려진 나라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가 된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 민족의 통일과 행복을 위해 매진했던 백범.
하지만 1949년 6월 26일, 통일운동을 저해하려던 세력에
의해 그는 암살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직 식지 않는 열정과 희생으로 잃어버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죽음까지 불살랐던 백범 김구.
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희생정신은, 혼탁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살아 있는 표본이요, 도전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1876년 황해도 해주 출생
1896년 일본인 살해 혐의로 체포, 사형 선고
1898년 탈옥
1902년 기독교 입문
1919년 - 3.운동 참여, 중국 상해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 역임
1949년 암살범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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