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잔치 희망 재림
제목 : < 생각한 모금 > 서른,잔치는 끝났다(?)
자료원 : 활천 정용섭 목사 현풍제일교회
발행일 : 95년 02월 01일
근자에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문학 작품들이 여럿 나왔다. 앞으로 언젠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될지도 모를 박경리 여사의 대하소설 '토지'완간은
그야말로 우리 모두의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25년동안 이 작품을 집필했
다니 놀라운 일이다. 김진명은 한국인의 애국심을 교묘히 이용한 가상 역사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1,2,3,'을 써서 두둑한 인세수입을 올린 것
같은데, 작가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결국 제국주의적 사고방식
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게 탈이다.
'생의 이면'으로 제1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이승우(그는 신학을 전공한
작가로서 존재문제와의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다)의 정신적 스승이라
할 이청준의 '흰옷'이나, 줄기차게 반개혁적 현실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이
문열의 '아우와의 만남'은 서로 다른 구도 가운데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
역사적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무명의 최영미를 1994년도 한국독서계에 일약 신데렐라로 등장케 해준 작
품은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이다. 80년대는 청소년들의 감상주의를 자
극할 정도의 시집들이, 예컨대 서정윤이나 도종환,그리고 이해인 수녀의 여
러 시집들이 수십 만권 씩이나 팔려나갔지만, 시집이 그렇게 많이 팔리는
일은 우리 나라만의 특이한 경우라고 하는데 어쨌거나, 90년대 들어와서는
더이상 그런 류의 시가 독자들을 불러모을 수 없다는 일반적 시각을 여지없
이 무너뜨린 작품이 바로 이것이다.
위의 작품들 중에 가장 많이 팔렸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모습을 가장 왜
곡된 방향에서 설정하고 있는 것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서른, 잔
치는 끝났다'(이하'잔치'로 약함)이다. 지면 관계상 '잔치'를 중심으로 이
시대정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잔치' 이후로 TV나 라디오 방송, 혹은 여러 문학모임 등에서 최영미는 일
약 명사로 활동하며 그의 문학관을 전도하였는데, 무슨 내용이길래 한국문
화계에 최영미 신드롬을 9년 내도록 불러 일으켰는가.우선 시집 '잔치'의
제목으로 선택된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전문을 읽어보자.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
아 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
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
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지
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란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것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새벽
이 오기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시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매우 분명하다. 70,80년대에 불같이 일어났던
민주화, 통일,노동운동이 이제는 파장이라는 것이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
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제 갈길로 자기 살 길을 찾아가버렸다. 이제 잔
치는 끝났다.잔치 뒤끝처럼 쓸쓸한 것도 없다.
최영미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으로서 국내적으로는 20여년 동안의
군사통치와 반독재 운동, 인권운동, 그리고 국외적으로 90년 전후의 소비에
트 연방의 해체, 서독의 동독 흡수통일,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현
대사를 경험하였다.
그녀는 그 시집에서 이념보다 돈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대, 그리고 포스
토모더니즘과 정보사회 가운데서 많은 방황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이 시 속에서 두번씩이나 이렇게 오친다.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인간 삶과 역사와 자연과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로부터
나온 언어적 형상화라기 보다는 일상적 삶을 재치있게 스케치 한 것에 불과
한 이 '시'가 회오리바람 같은 인기를 끈 이유는 우선 읽기가 아주 쉽다는
것과, 그리고 나름대로의 에로티시즘을, 그것도 매우 정태적이고 냉소적이
로 제공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역사적 책임감으로부터의 도피를 합리화
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이 시에서 그려진 모습이 현대인의 자화상이라 보
면 틀림 없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의 총아인 컴퓨터문명에서 볼 수 있듯이 탈역사적 정
신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컴퓨터는 오래 전에 마틴 부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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