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사가 회개하고 목사가 되다
나는 1981년 2월 7일~ 11일까지 김제 난산교회(가희남 목사 시무)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기 며칠 전에 안전기획부 정보원을 만난 일이 있었는데, “다음 주에 어디 갑니까?” 라고 묻기에 “김제 난산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갑니다.” 라고 대답하니까 정보원은 갑자기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아-니 난산교회를가요?” 그러기에 “왜 그러십니까? 난산교회에 가면 안됩니까?” 라고 반문하니까 그는 말하기를 “난산교회 강희남 목사는 굉장한 사람입니다. 유신체제를 제일 강력하게 반대하고 주민등록증도 소지하기를 거부한 사람입니다. 고목사님까지 그 교회에 가면 곤란한데요.” 라고 난처한 입장을 나타내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대답하기를 “나야 청하는 곳은 어디나 가서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대답하니 그 정보원은 대답하기를 “이왕 가기로 한 것 할 수 없지요. 아무쪼록 문제가 안되도록 조용하게 인도해 주십시오.” 2월 7일 김제 난산교회에 도착하였다. 강희남 목사님은 그의 장남 강세영 선생과 같이 부자가 옥고를 치른 분이었다. 목사님은 반공법으로 10년 징역을 받고 약 2년 가까이 옥고를 겪으시고 1980년 1월 초에 석방되신 분이었다. 광주교도소에서 얼굴만 보고 눈짓으로 인사를 하다가 이제 만나서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개가 무량했다. 목사님을 만나서 여장을 풀고 잠시 대화를 하고 있는데 김제경찰서 서장, 정보과장, 담담형사 등이 와서 인사를 청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영접하여 피차에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강목사님의 표정은 굳어지기만 할 뿐 한마디의 말씀이 없었다. 눈도 가늘게 뜨고 몸은 움직이지 않고 정좌하고 앉았는데 그 모습은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경찰서장과 정보과장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당황하는 빛을 감추려고 애를 쓸 뿐이었다. 나는 분위기가 점점 차가워져 가기에 조금 부드럽게 하려고 유머 섞인 말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경찰서장은 지극히 부드러운 말로 아무쪼록 부흥회가 무사히 끝나도록 협조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약 20분간의 대화가 끝난 후 서장일행은 숙소를 나섰다. 첫날 밤 집회가 시작되었는데 교회 앞 큰길에는 경찰서 기동대차 두 대가 와서 대기하고 있었고 교회 안에는 6,7명의 정보과 형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목사님은 첫날 밤 사회를 하면서 대표기도는 교회직원에게 시키지 아니하고 자신이 직접 기도하기를 12분 가량이나 길게 하였다. 그 내용 가운데는 나라를 위한 기도가 많았다. 이 나라에 하나님의 정의가 속히 하수같이 흐르기 위하여 전두환 악당들이 속히 회개하고 물러가게 하옵소서하며 기도하니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것 모양으로 조용하고 엄숙했던 것이다. 첫날 밤 집회는 신앙생활의 삼대목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여 온 교회가 은혜를 받고 무사히 마쳤다.
둘째 날 저녁이 되었다. 국민윤리 확립에 대한 십계명을 해석하는 설교를 마치고 광고시간에 강목사님은 또 다시 호령을 하는 강력한 말씀을 했다. “여기 교회에 와 있는 정보과 형사들은 잘 들으시오 당신네들은 상부에서 가라니까 할 수 없이 와서 앉아 있겠지만 이번 기회에 회개하시요! 하나님께서 그대들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이 기회를 마련했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이런 기회에 회개하지 않고 교회를 감시하는 일만 한다면 하나님이 용서치 않을 것이니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시오” 참으로 엄격한 말이었다. 형사들은 머리를 푹 숙이고 아무 소리 못하였다.
고영근/목민선교회 회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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