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와 체험(3)

  조회수 : 511    / 등록일 :    / 출처(저자) : 컴퓨터선교회모음



V.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준비

첫째, 중생과 성령 세례 혹은 충만은 구별된 체험이라는 것을 먼저
지적으로 동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의 성령 세례를 체험했던
다섯가지 사건을 다시 상고하기 바란다. 마가의 다락방 사건은 예수님
께서 성령 세례를 기다리는 말씀을 인정하고 믿었다. 고넬료 가정 예배
에서는 사도 베드로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가 되심과 그의 약속하신
것을 소개를 받으므로,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고 사마
리아 교회에서는 베드로와 요한 사도의 성령 받기를 기도하므로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 아나니아의 소개로 성령 세례 받았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요한복음 15:15-16절
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
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하
시니리"라고 하셨다. 이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이 성령의 불이
이미 붙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하셨고 (눅12:49), 성령의 능력을 덧
입고 이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였다(행1:8).

셋째, 이와같이 약속하신 성령 세례를 나도 꼭 받아야 겠다고 열화같
이 열망해야 한다. 요한복음 7:37-39절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
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
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하
였듯이 성령 충만 받기를 목마른 사람이 생수를 찾듯이 간절히 사모해
야 한다.

넷째, 이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누가복음 11:13절에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을 자직에게 줄줄 알
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
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 끝까지 믿어야 한다.
조금 기도해 보고 혹은 부흥회 몇번 참석해 보았는데 기별이 없다고
쉽게 낙심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
일점 일획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 진다고"(마5:18) 하셨으며 " 변역하시
지도 않으시며"(막3:6),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약1:17)고 하셨기때
문이다.

여섯째,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창피한 일이거나 미치거나 잘못되지않
을까 염려하지 말라. 어찌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와 능력을 덧
입는 것이 창피한 일이겠는가? 이 세상 일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
이요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치거나 잘못되지나 아니할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무시한 처사이다. 사랑의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가
장 소중하신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데 사람을 미치게 하거나 잘못되게하
실 어리석은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죄도 회개하지 않고 정욕으로 잘못 구할 때 원수 마귀도 천
사를 가장하여 거짓으로 성령을 받는 것처럼 어떤 체험을 줄 수 있다.
(고후11:4). 그러므로 성령 셰를 받기 위하여 구할 때 먼저 우리 주 예
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성도가 구하되 다른 사람과의 비교 의식
과 경쟁에서 구하거나, 마음에 해결하지 못한 죄를 그대로 품고 구해서
는 안되며 그리고 잘못된 목회자에게 함부로 안수를 받아서는 안된다.

= 마무리 =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도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오직 중생만
한 신자와 성도인 것이다. 중생만 한 성도는 다같은 주님의 백성이지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그 쓰리고 아픈 공로로 예비하여 놓으신 축복과
유업을 반쪽만 누리고사는 크리스챤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 세례와 체험을 인간 자신의 지성과 체험 만으로 그것을 분석, 종합
하려고 할 때 솔직히 한계 상황에 부딪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전지전능하신 역사를 하나님과 같은 지성과 지혜
가 아니고서는 명확한 대답을 4차원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
나 구약의 성령의 사역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사
역의 특수적이고 직접적인 사역의 구별은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인식해
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