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사설
불과 5년전 구소련 공산당 지도자들은 비밀문서들을 폐기하고 황급히
모스크바를 빠져 달아났다. 당시 공산당의 재기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
다. 그러나 지난 17일 실시된 러시아 총선은 그런 지레 짐작을 무색케
하고 말았다. 이번 선거에서 공산당은 총유효표의 20% 이상을 득표하며
러시아의 최대 정치세력으로 재등장했다.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가 이끄는 극우보수주의 민주자유당의 부상
과 함께 이번 선거결과는 개혁세력의 전락과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좌절
을 가져왔다. 옐친의 집권당은 10%에 불과한 득표로 제3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많은 러시아국민들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여건 악화에 실망한 나머지
안정과 경제회복을 갈망하게 됐다. 그러나 공산당이 장담한 새로운 러시
아제국의 건설을 국민들이 바라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러시아 공산당의 부활은 분명 낙담스러운 현상이지만, 꼭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러시아 정치-경제개혁이 진행되다 이번 선거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뿐이다. 새로 출범할 국가의회(듀마)는 과거보다 보수
적 색채를 띠게 되겠지만, 획일성에서는 벗어날 것이다. 반옐친 야당연
합이 대통령의 비토권을 무력화할 수 있는 3분의 2선을 확보하기 전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힘들며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제 남은선택
은 완만한 속도의 개혁이다. 행동이 아닌 반대의사 표명으로 새 듀마는
옐친정부를 보다 보수적인 정책방향으로 몰고 갈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우려할 수 밖에 없는 역사속에 살아온 러시아국민들은
벌써 내전 발발이나, 지난 93년10월과 같은 대통령과 의회간의 유혈대립
재연을 걱정하고 있다. 옐친대통령이 내년 6월 실시예정인 대선을 취소
할 것이라는 소문도 자자하다.
올 연초에는 옐친이 총선을 실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풍문도 나돌았었
다.
러시아는 지난 수세기간 기형적 정치체제에 빠져들 수 있는 개연성을
수없이 보여왔으며, 이번 선거로 나타난 정치적 소용돌이에 대한 보장도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러시아나 미국은 이번 총선결과가 하나의 경고적
사건임에는 분명하지만, 반드시 개혁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선 이번 선거는 사상 최대 민주선거중 하나였다. 총유권자의 60%에
해당하는 6천여만명의 러시아국민들이 선거에 참여했다. 미래에 대한 불
안과 의혹이 어떻든간에 러시아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과거 1917년 볼셰비키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했던 구소 공산당은
선거로 국민들의 지지를 확인해본 적도 없고, 법률 하나를 통과시키기
위해 의회세력을 규합해야 할 필요성도 없었다.
중도파들은 분열돼 있고 개혁파는 세력기반을 상실했지만, 신공산주
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연합전선을 우려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
다. 공산당 지도자로 일약 떠오른 겐나디 주가노프도 지리노프스키와 협
력관계를 맺어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지키기 힘든
공약들을 남발했다. 그들의 바람이야 어쨌든 러시아는 이미 제국을 재건
할 군사적-경제적 여력을 상실한지 오래다. 겨우 회복단계에 들어선 경
제를 이전처럼 강제로 국가통제하에 두는 것도 어려워졌다.
옐친대통령도 앞으로 의회가 소란스러워지고, 어쩌면 공산주의나 극
우 민족주의자가 크렘린에 입성할지도 모를 내년 대선을 앞두고 권의주
의 통치에 빠지기 쉬운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러시아국민들은 이제 자
신들의 투표권을 행사할 줄 알게 됐고, 러시아 정치지도자들은 이를 받
아들여야 할 때가 됐다.
발행일 : 95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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