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곡의 역사 속에서 인류의 평화, 선구자적인 삶 실천(강원용목사)
▲용정중서 학창시절 보내-고 강원용 목사는 18살에 중국으로 건너가 용정중학교에서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 등과 학창시절을 보내고 잘사는 농촌을 만들기 위해 농민계몽운동을 벌였다.
▲세계교회운동에 앞장-고 강원용목사는 세계교회 협의회 중앙위원 및 실행위원으로 세계교회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강목사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입지를 강화했다.
한국교회 진보라인을 이끌었던 여해 강원용목사가 향년 89세로 삼성의료원에서 별세했다. 고 강목사는 일제와 8.15해방, 6.25전쟁, 이승만독재정권, 군사독재정권 등 ‘질곡의 역사’ 중심에서 민족운동과 평화운동 그리고 교회개혁을 주도했다. 더욱이 강목사는 종교간의 대화를 통해 민족의 평화와 번영에 앞장섰다. 강목사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크리스챤 아카데미 대화모임은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갈 많은 인재를 발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전에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고 강원용목사는 식민지시대에 설움받는 가난한 민족이 잘살아야 민족해방의 소망이 보인다다는 신념으로 1935년(당시 18세)만주 용정으로 건너가 윤동주시인을 비롯한 문익환목사 등과 함께 용정중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여기에서 고 강목사는 은진중학교 교사였던 김재준목사를 만나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관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한국교회의 진보라인의 중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특히 강목사는 용정중학교를 다니면서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고, 잘사는 것만이 민족의 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많은 것을 깨달은 강목사는 해방후 김규식, 여운형 등 사회주의 진영에 가까웠던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청년대표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 강목사는 설린형제단을 결성, 김재준목사와 함께 경동교회를 설립하고 40년동안 시무하면서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시켰다.
민족해방과 6.25한국전쟁의 격동기를 겪은 강목사는 1956년 미국 유니온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여기에서 강목사는 스승이었던 폴 틸리히와 라인홀더 니이버 교수를 만나 자신의 신앙과 사유에 대해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철학은 양극의 대립과 갈등의 지점에서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간 상호이해를 통해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사이·너머”에 있었다. 한마디로 당시 ‘사이 너머’는 기독교 현실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강목사가 질곡의 역사와 한쪽을 요구하는 한국사회 속에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양쪽을 수용하려 했던 것도 ‘사이 너머’의 영향 때문이다. 강목사는 이러한 입장 때문에 양쪽으로부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강목사는 현대사의 중심에서 선구자적인 삶을 살아왔다.
-종교간 벽 허문 평화주의자-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끝마치고 귀국한 강목사는 자신이 경험한 ‘사이 너머’를 실천하기 위하여 1965년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설립, 대화모임의 아카데미운동을 이끌었으며, 민족의 운명을 책임질 많은 인재들을 발굴, 배출했다.
크리스챤아카데미 설립과 함께 가진 6대 종교간의 모임은 세계적인 종교간 대화운동으로 확산, 세계평화와 사랑에 중심한 화해공동체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강목사는 아시아 평화회의·세계종교인평화회의의 의장 등을 맡아 종교인들을 사회참여와 평화운동으로 이끌어냈다. 강목사의 아카데미운동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고, 안식일도 인간을 위해서 있다는 그의 화육(化肉)신앙에서 출발했다. 강목사가 지향해온 사회는 하나님의 사랑에 바탕을 둔 화해의 공동체였으며, 궁극적으로 ‘인간화’를 추구했다. 강목사는 이를 위한 과정과 방법을 ‘대화운동’에 두었다.
-에큐메니칼운동의 중심-
무엇보다도 강목사는 해방이후 줄곧 한국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강목사가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장33절)’의 말씀을 우선가치로 삼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강목사는 1970년대 김수환추기경, 함석헌선생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고, ‘민주화국민회의’ 대표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럼에도 강목사는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로 현실정치에 거리를 두고, 목사로서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했다.
강목사는 또한 1948년 이후 세계교회운동에 참여, 세계적인 인물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한국의 에큐메니칼운동을 이끌어 왔다. 강목사는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국제적인 지원과 협력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강목사는 교회와 사회의 두꺼운 벽을 허무는 중심에 있었다. 그럼에도 강목사는 보수적인 한국교회로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