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의 보리밥

  조회수 : 805    / 등록일 : 2008-02-04   / 출처(저자) : 크리스천 인용 백과사전


조선 영조(英祖) 시대였다. 경기도 장단땅 오목이라는 동네에 이종성(李宗城)이라는 대신이 살고 있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오목이 대신이라고 불렀다. 이 정승은 은퇴해 살면서 낚시질을 다니는 것이 일과였다.
하루는 점심 때가 되었는데 무더운 여름날이라 낚시를 쉬고 상노 아이와 함께 개울가 주막집으로 들어가서, 도시락을 풀어놓고 점심을 먹었다.
이때 마침 이웃 고을 원님의 부임 행차(赴任行次)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역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같은 주막집으로 들이닥치게 되었고, 공교롭게도 원님은 이 정승이 점심을 먹고 있는 방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원님이라는 자는 비단으로 몸을 감고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앉았으니, 행동이 안하무인(眼下無人)이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대단했다. 그리고는 가만히 살펴보니 방 한 옆에 한 노인과 한 아이 녀석이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잠방이에 옷차림이 분명히 촌백성이며, 점심이라고 펴놓고 먹는 밥을 보니 자기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원님은 참지 못하고 이 정승에게 말을 건넸다.
"늙은이, 자네가 먹는 밥이 뭔가?"
이 정승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보리밥이라는 것이오."
"그렇다면 좀 맛보여 줄 수 없겠나?"
"그것이 뭐가 어려울 것이 있겠소."
하고 보리밥 한 숟갈을 떠서 주었다.
원님은 보리밥을 입 속에 넣고 씹어보더니, 이런 것을 어떻게 사람더러 먹으라고 주느냐면서 전부 뱉어 버리고 노발대발하였다. 원님은 점심을 시켜 먹게 되고, 이 정승은 식사를 끝낸 뒤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런데 원님이 식사를 끝낼 무렵이었다. 이 정승 댁 하인이 찾아와서, 이 정승께서 만나자는 전갈을 전했다.
원님은 영문도 모르고 허겁지겁 이 정승을 찾아갔다. 일인지하(一人之下)요 만인지상(萬人之上)인 정승 앞이라 일개 지방의 수령으로서는 감히 그 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했다. 뜰아래서 절을 올린 뒤에 두 손을 마주잡고 허리를 굽히고 서 있었다.
이윽고 대청 위로부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얼굴을 들어서 나를 보라."
원님은 마침내 얼굴을 들어서 대청 위를 바라봤다. 청천벽력이었다. 대청 위의 얼굴은 바로 아까 자기가 들렸던 주막집에서 보리밥을 먹던 그 늙은이가 아닌가? 고개가 저절로 떨어지고 어깨가 축 늘어졌다. 마침내 무릎을 꿇고 땅 위에 엎드렸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대청 위에서는 또다시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대는 한 고을의 목민지관(牧民之官:백성을 거는리는 관원)으로서 두 어깨에 부하(負荷)된 책임이 막중하다. 그대의 교만한 안하무인의 태도와 백성들이 먹는 보리밥을 악식(惡食)이라 하여 뱉어 버리는 사치스러운 생각으로는 백성을 도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국사(國事)를 그칠 뿐이다. 내가 몰랐으면 모르겠지만 안 이상은 모르는 체할 수 없다. 이 자리에서 부임할 것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원님은 추상(秋霜)같은 호령에 벌벌 떨며 할 수 없이 청운(靑雲)의 뜻을 버리고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