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의병장 출신의 구연영 전도사
본문 : 눅 11:49
전통 무가(무가) 출신의 구연영은 1895년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경기도 이천에서 창의하여 이천.광주.남한산성
에서 일본 수비대와 전투를 벌였고 멀리 경상도 의성에까지 진출하여
항일 무력항쟁을 벌였다.
그러나 의병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6개월 만에 고향인 경기도광주로
돌아온 그는 민족운동의 방향전환을 꾀하여 1897년 2월 서울 남대문 안
의 상동교회를 찾아갔다. 그 곳에서 서민적 의료선교사 스크랜톤을 만
났고 숯장수 출신 민족운동가 전덕기도 만났다.
그는 결심한 지 3년 만에 세례를 받은 후 매서인이 되어 경기도광주.
이천.용인.원주.장호원 등지를 다니며 성서를 팔고 전도하였다. 과거
그가 의병으로 활약했던 지역이었다. 의병 동지 차화춘.전무호.장춘명
등이 그의 전도를 받아 교인이 되었고, 궁뜰.덕뜰.오천.오향 등지에
교회가 속속 설립되었다. 아들 정서(정서, 호는흥국)도 그를 도와 전도와
민족운동에 가담하였다.
1905년 정식 전도사가 되었고 이 때부터 주로 일진회를 규탄하는 강연
을 하였으며 교회마다 구국회를 조직하였고 국채보상운동을통한 민족운
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일진회는 "경성 동편 10여 군에구연영만 없으면
기독교도 사라질 것이요 배일자도 근절될 것이다"며 그를 경계하였다.
1907년 한국 군대 강제해산에 이은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그는이천
을 습격한 일본 헌병대에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이천 장터 미루나무에
묶인 채 총살당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44세, 아들의 나이 25세였다.
그는 기독교인 최초의 순국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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