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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순례3 승동교회
조회수 : 686 / 등록일 : / 출처(저자) :
국민일보
제목 : <한국의 교회순례:3> 승동교회
⊙102년 역사… 3·1운동의 산실/곤당골서 천민들과 첫 예배… 민족혼 면
면히/합동통합 분열 아픔딛고 화해와 통일 모색 서울 종로구 인사동137
승동교회(담임 박상훈목사)는 예장합동의 모교회이자 한국기독교사에 빛나
는 3·1운동의 산실이다. 구한말 문호 개방의 격변기에 설립돼 일제의 수난
기와 6·25사변,59년 장로교단 분열의 아픈 상처 속에서도 한국교회사에
꺼지지 않는 등불로 족적을 남기고 있다. 승동교회는 1893년3월19일 미국인
선교사 사무엘 무어목사가 곤당골(지금의 롯데호텔자리) 가정집에서 첫 예
배를 드리면서 설립됐다. 무어는 1892년9월19일 부인 로즈여사와 제물포항
(인천)에 첫발을 내딛고 『이땅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
며 기도했다. 아펜젤러나 언더우드가 지주계급이나 중산층을 주요전도대상
으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백정등 천민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
한 그는 도보로 서울까지 와 당시 천민들이 많이 살던 곤당골을 선교지로
택했다.
곤당골 교회는 천민들이 많이 몰려들면서 양반신도중 일부가 분립, 홍문
섯골교회를 세우는등 시련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무어목사와 교인들은
『백정들과 함께하는 교회』『사회를 외면하지 않는 교회』를 외치며 케리
그마를 선포,교회분립 5개월만에 탕자의 돌아옴같이 분립한 성도들이 돌아
와 다시 하나가 됐다. 이때 곤당골교회는 천민들이 많이 다닌다고해 『백
정교회』라고도 불렸다.
●무어목사 『백정촌』에 설립
1902년 제중원내의 동현예배당으로 옮겨 새문안·연동교회와 함께 연합운
동을 전개하던 곤당골교회는 1904년 제중원이 남대문 밖에 세브란스병원을
짓고 이전하자 현재의 위치 사동(인사동)으로 옮겨 승동으로 이름을 바꾸고
교회를 3층으로 크게 확장했다. 당시 이 교회건물은 궁전을 제외하고는 경
성에서 제일 큰 건물중 하나로 기록됐다. 성경보급사에 큰 업적을 남긴 서
상륜이 바로 그때 전도사로 부임 하면서 교회의 조직을 갖추기 시작했다.
초대 이눌서(레이몬드) 2대 곽안련(클락)목사와 초대장로였던 이여한목사의
3대를 거친후 4대 차상진목사가 부임하면서 승동교회는 3·1운동의 산실이
된다. 3·1운동이 일어나기 두달전 이 교회에서는 서울시내 대학생들이 독
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연희전문 학생회장이면서 교회
면려 청년회 회장이던 김원벽을 중심으로 2월20일 승동기독학교 교무실(현
재의 중등부실로 추측)에서 보성전문 주익 강기덕,연희전문 윤화정,경성
전수학교 이공후 윤자영,세브란스의전 이용설,경성의전 김형기 김대익 한
창환등 청년 9명이 모여 학생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 계획은 나중에 이승
훈이 거국적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만류해 무산됐으나 학생들은 28일 독립
선언문을 교회에 집결시켜 각 지역으로 배포하고 태극기 1천5백장을 이곳에
보관했다가 탑골공원에 모여든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김원벽은 3·1운동후 2차 만세운동 지도자로 추대되어 3월5일 남대문에서
2차 봉기를 지휘하다가 체포돼 2년간 옥고를 치른뒤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1920년 아들 김지성(전 용산국교교장)을 남기고 사망했다. 이 사건은 그뒤
전국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차상진목사는 3월14일 자신을 비롯,11인
의 양심적인 지성인들이 3·1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투옥된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혈서,『12인의 장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한뒤 옥고를 치렀다.
승동교회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강제수색등 탄압으로 교인수가 3분의1로
줄어드는 시련을 겪었으나 사랑 봉사 선교의 승동정신을 바탕으로 주민들과
호흡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시는 이같은 역사를 보전하기 위해 지난
93년 승동교회를 3·1운동 유적지로 지정,표석비를 세웠다. 서울시내에서
3·1운동기념예배를 드리는 곳은 승동교회가 유일하다.
애국 애족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승동교회는 35년 김익두목사가 8대 담임
으로 부임하면서 사경회와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실천을 강조,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김목사가 열었던 부흥회는 당시 수만명이 운집,교회
사에 30년대 최대 부흥집회로 기록돼 있다. 이때 승동교회는 조선신학교를
설립해 장로교신학의 뿌리가 됐다.
●궁궐빼고 최대건물 명성
그러나 1959년 9월 승동교회에서 치러진 장로교 제44차 총회에서 교단내의
에큐메니컬운동으로 빚어진 갈등이 증폭돼 목회자들이 연동파(예장통합)와
승동파(예장합동)로 분열됐다. 당시 이 교회 담임이던 이대영목사를 주축으
로 한 보수주의 목회자들은 승동교회를 중심으로 모여 합동교단을 형성했
다. 한국교회가 광복50주년을 맞는 올해를 『분열과 단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