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순례18 서울침례교회

  조회수 : 760    / 등록일 :    / 출처(저자) : 국민일보



제목 : <한국의 교회순례:18> 서울침례교회

⊙서울시내 첫 침례교회… 교단내 장자의 “위풍”/89년 선교원화재 시련
딛고 “복음증인” 재무장 한국 침례교회의 역사는 1889년 캐나다 선교사인
팬윅이 원산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침례교회는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반대,1942년에는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 33명이
투옥되는 『33인사건』이 발생했고 침례교단은 일본인들에 의해 『동아기
독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수난의 역사를 딛고 서울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가 서울침례교회다.

●1946년 창립예배
서울시 중구 충무로5가 55에 자리잡은 서울침례교회(한명국 목사)는 한국
침례교회의 1번지로 불린다. 1946년 원산에서 목회하던 안대벽 목사가 중구
필동에서 8명의 신자와 기도회를 가졌고 그해 12월4일 장일수목사가 초대목
사로 부임해 『필동침례교회』라 명명하고 창립예배를 드린 것이 교회역사
의 시작이었다.
필동침례교회는 1949년 미국남침례회 선교부와 선교협력관계를 체결하고
『서울필동교회』로 개명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쫓겨난
존 에버나티선교사가 미국남침례회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에 정착,협
동목사로 부임했다. 『나는 동양인을 위해 선교할 것을 다짐했다. 중국이 ?아니면 한국에 남겠다』
그러나 6·25로 교회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신자들은 부산으로 피난했고
그곳에다 부산침례교회를 세웠다. 일제치하에서도 압제에 굴하지 않았던 침
례교회 신자들은 포연속에서도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생명력
을 발휘했다.
환도후 교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교회명이 서울침례교회로 바뀌고 웅
장한 예배당이 완공됐다. 6·25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미국인 종군 목사와
장병들을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해 기념예배당을 건립한 것이다.
이범석 장군의 동생이며 당시 서울시장인 이범승씨로부터 6백71평의 대지
를 기증받았고 건축비는 무초대사,존 에버나티선교사,침례교인 병사들,
종군목사등이 감당했다. 지금도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서울 침례교회는
당시 장안의 명물이었다.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대교회 10곳 개척
1950년 한국의 침례교회는 총 4백여개 정도였다. 이중 남한은 40여곳에 불
과했다. 문경 점촌 공주 울릉도등에 침례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서울침례교
회가 세워진 46년 이전에는 서울시내에 한곳의 침례교회도 없었다. 서울침
례교회는 개척자의 사명감을 갖고 발전해 왔다. 교회를 개척한 안대벽목사
,초대 장일수 목사가 교단의 총회장을 지냈고 2대 한기춘 목사는 신학대학
장,3대 김용해 목사와 5대 조효훈 목사,8대 한명국 목사는 총회장을 지냈
다. 서울침례교회는 항상 한국침례교회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서울침례교회
의 목회자는 곧 한국침례교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했
다. 교인들도 투철한 사명감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제일침례교회
답십리침례교회 성천침례교회 서문침례교회등 굵직한 교회만 10여곳을 개척
했을 정도로 위세가 당당했다. 한때 서울침례교회는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교회로 불렸다. 80년대초 옥한흠 홍정길 하용조목사와 함께 젊고
신선한 『4인방 목회자』로 불리던 이동원목사가 6대목사로 부임해오면서
대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목사는 독특한 제자훈련을 목회에 도입
해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이목사가 이 교회에서 목회한 것은 3년10개월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목사
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도 강력하게 남아 있다. 제8대 한명국목사가 부임한
때는 1986년 11월23일. 이미 도심지의 주민들은 강남지역으로 썰물처럼 빠
져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적신자가 2천여명에 이르는 대교회
였다. 가슴이 뜨거운 목회자인 한목사는 의욕적으로 목회에 임했고 서울침
례교회는 『성장』과『성숙』이라는 두개의 날개를 활짝 펴고 균형잡힌 발
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40년의 교회역사를 통해 가장 큰 시련이 닥쳐왔다. 1989년 10월16
일. 교회 선교원에 화재가 발생해 무고한 어린이들이 희생을 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한목사와 신자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화재사건 ?이후 신자들은 매주 30∼40명씩 줄어들었다. 희생자 가족들의 절규에 ?피눈물을 쏟았다. 한목사와 신자들은 이 위기에서 더욱 뜨겁게 기도했다. ?화재사건의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16억원을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했다.

●천5백명성도 복음합창
한명국 목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일생을 살아오면서 저만큼 연단받은 목회자는 드물 것입니다. 서울 침례
교회가 공중분해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